감각의 독선 - 구본창의 탐미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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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독선 - 구본창의 탐미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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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독선 - 구본창의 탐미주의(1)

 


글/박평종(미학/사진비평)<월간사진 2008년 2월호>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시(詩)는 인간의 정신활동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고양된 형태의 언어처럼 여겨져 왔다. 시어의 어떤 속성이 그런 생각을 낳게 했는지는 수많은 시론들을 깊이 있게 읽고 이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언어의 속성을 떠올려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언어란 뜻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데에 그치고 마는 단순한 기호가 아닌 것이다. 시는 언어의 자기초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자신을 규정하는 무엇, 그 바깥으로 벗어나면 자신이 아닌 것, 요컨대 자신의 이데아툼(Ideatum)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을 넘어서면서도 여전히 자신으로 남는 성질을 자기초월성이라 부를 수 있겠다. 논리는 이를 모순 혹은 역설이라고 부르겠지만 논리의 장을 벗어남으로써 언어는 풍요를 얻는다. 시어의 존재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지혜 중의 하나는 이러한 자기초월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서는 힘이 자기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떠한 다른 앎보다 황홀하다. 시를 일컬어 심미적인 언어라고 할 때 시인의 생각은 박학한 학자나 뜻의 전달을 위해 정확한 문장을 빚어내는 언어의 달인들보다 더 풍요롭다. 그의 생각은 시어 속에서 끝없이 갱신되고 매순간 자신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분석과 종합, 판단과 유추, 가설과 추론 등 정교하고 세밀한 사유와 언어구사는 인간과 세계의 신비를 알아나가는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심미적인 언어는 학자들의 깊은 통찰이 담긴 정교한 언어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고결한 지성에 속한다고 많은 시론들이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이는 심미적 언어구사란 일정한 훈련이나 학습을 통해서 갖출 수 있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전체를 한눈에 굽어보는 통찰력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인간과 세계를 교감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알고자 하는 열정은 박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이해와 교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딱딱하고 건조한 언어는 지식을 위해서는 봉사할 수 있지만 나와 세계의 교감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심미적 언어의 성질을 결정하는 데에는 그래서 정교한 사유보다는 개인의 감수성이 더 우선시되는 것 같다. 감수성이란 외부의 현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뜻하는 말이지만 거기에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세와 방법의 문제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감수성에도 윤리가 있다. 감수성은 외부의 자극을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는 감각보다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 성격, 세계관 등 주관적인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그 자극의 수용에 영향을 미침을 뜻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감수성은 개인의 견해나 주관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감수성은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때로는 타인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그것은 주관성이 덜 섞인 표현인 감각이라는 말로 대체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감각의 규칙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감성론으로 출발한 미학(Aisthetica)의 어원이 감각의 일반적인 형태를 뜻하는 아이스테시스(Aisthesis)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감각은 보편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있었다. 비록 데카르트와 같은 대다수의 근대 철학자들이 감각은 오류를 낳는다고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편 감각에 대한 현대의 사유는 점차 감각의 자율적 지위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인식 활동에서 차지하는 주요한 역할을 짚어나가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각은 외부의 현상을 지각하는 과정의 첫 단계를 이룬다. 가장 복잡한 고도의 인식도 우선은 감각에서 출발한다. 요컨대 감각은 인식의 기초이자 토대이며 모든 지성의 활동이 시작되는 원초적 지점이다.
예술은 감각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에스테티카의 탐구 대상이 된다. 시대와 유형을 불문하고 예술가들은 항상 자신의 내밀한 감성을 매개로 하여 창작물을 주조해 냈다. 예술작품에서 뜻을 읽어내는 데에만 급급한 경우는 예술에 대한 온전한 체험일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평범한 일반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을 테지만 때로는 너무나 자명하여 진부하기까지 한 이같은 사실이 망각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진이 세계에 대한 기계적 복제에 불과하다는 통념이 지배하던 때에는 사진가의 감각과 작품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감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작품과 세계를 자신의 감수성에 따라 중재하는 자라고 한다면, 사진가란 작품과 세계 사이에 놓인 거리를 단순히 이어주는 교량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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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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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을 찾아서, 1982

 

 

 

초기 사진의 형식 실험

 

 

 

1980년대의 한국사진에 감각의 중요성을 제기한 작가로 구본창을 거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만이 홀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고집스럽게 감각 제일주의를 밀고나간 경우는 흔치 않아 보인다. 80년대 초중반부터 꾸준히 전시를 통해 발표한 그의 작업은 우선 형식주의적인 실험의 성격을 띤 듯 보였다. <열 두 번의 한숨>(1985), <일분간의 독백>(1987), <긴 오후의 미행>(1988)은 그 시기 한국사진의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어 보면 파격적인 도발과도 같았다. 이후 1990년에 열린 <생각의 바다>전 또한 그렇다. 이 전시는 <자화상>(1980-81)과 <빛을 찾아서>(1982), <탈의기>(1988), <기억의 회로>(1988) 등 그간의 작업을 한데 묶어 정리한 것으로, 1992년에 출간된 작품집에는 <In the beginning>(1991-95) 시리즈에 포함된 작품 중 몇 점이 추가되었다. 이 작업에 활용된 각종 표현기법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표현의 형식 찾기에 골몰해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콜라주와 몽타주, 포토그람, 각종 오브제, 유제면 긁기 등 개별 이미지의 형상화를 위한 수단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장의 사진을 조합, 병치하거나 나아가 바느질까지 사용하여 전체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전방위적 테크닉을 동원하고 있다. 기법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 작업들은 서양의 모더니즘 예술이 그러했듯이 전통예술에 대한 도발과 항의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결국은 예술의 확장으로 귀결되었지만 말이다. 한국사진의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어 보자면 그의 작업은 기존 사진의 권위에 대한 거친 도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가 도발적인 작품들을 발표하던 시기의 한국사진은 촬영 이후의 수작업을 배제함을 보편적인 규범처럼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오히려 촬영 이후의 수작업을 더 중요시했던 그의 작업이 낯설게 보였던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대립은 기실 서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어서 한국사회에 구축된 긴장의 구도는 서양사진의 경향을 빠르게 수용했던 그의 기민함이 촉발시켜낸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처럼 새로운 경향의 수용으로 인해 한국사진의 폐쇄성은 조금씩 헐려나갔다. 형식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의식을 표출하고자 하는 젊은 작가들은 구본창이 보여준 형식주의적 실험에 감화되어 차츰 사진의 표현 형식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실험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이 시기 그의 작업의 주요 주제는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시각적 탐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작업노트나 대담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쉽게 읽어낼 수 없었던 비평가들과 관객들의 당혹감이 여기에서 기인한다. 작품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하찮아 보이는 사물이나 특정한 이미지들은 작가 개인의 경험 속에서는 매우 중요했던 요소들이다. 그가 그 요소들을 화면 속의 공간에 배치하고 이미지를 구성해나갈 때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감각이었다. <생각의 바다>에 대한 작가론에서 이영준은 세간의 평을 인용하여 그가 “가장 세련된 감각을 갖춘 예술 사진가”이며 “(사물의) 반란을 잘 조절하고 연출하는 재주와 감각을 가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박주석은 같은 작품론에서 “그의 사고와 감수성이 평범함을 크게 벗어”나 있으며 “고도로 감각이 발달한 작가”처럼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작업의 감각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아 이를 감각지상주의라고까지 부를 수도 있을 법하다. 다수의 평자(評者)들이 그의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고 언급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평가가 상투적인 찬사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감각 의존적 경향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작가가 지닐 수 있는 뛰어난 감각이란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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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의기, 1988

 

 

 

세계의 선물

 

 

 

감각의 기본적인 역할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면 시각이나 후각, 청각 등이 사람보다 뛰어난 동물의 감각을 거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감각은 외부의 현상을 즉자적으로 감지해내는 능력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감각도 스스로 자극을 걸러내거나 선택적으로 수용하는가. 혹은 개인의 주관처럼 의지를 갖는가. 감각은 의식과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현상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렇지 않다면 감각은 의식이나 판단력 등 개인의 의지에 따르는 정신활동과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의식을 지향성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했던 후설에게는 감각에도 지향성이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지향성은 스스로 대상을 찾아 선택적으로 지각해내는 적극적인 활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막연히 이끌려 거기로 향해간다는 수동성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아비케나가 제시한 지향성이 그렇고 후설의 지향성 이론 형성에 영향을 준 브렌타노의 심리주의 이론에도 이러한 생각이 깔려있다. 지향성을 현상학적인 개념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매우 복합적인 여러 문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것의 기초 개념은 인간의 의식이 항상 외부세계로 향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의식의 지향성이란 비록 현상학자가 아니더라도 대개의 철학자들에게 별 문제 없이 수용될 수 있는 듯하지만 감각의 지향성은 좀 더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감각과 의식은 그것의 성질이나 역할, 대상에 대한 지각의 과정 등에서 큰 차이를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임의적으로 지향성을 인식과 감각 모두를 아우르는 인간의 지각활동이 자신의 바깥세계를 향한다는 의미로 축소, 혹은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편의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겠다. 편의주의는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때가 태반이지만 방법론적으로 사용할 때는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는 부수적인 문제를 잠시 망각함으로써 주된 이해의 대상에로 곧바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유효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한 개인을 바로 그 개인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요소들은 끊임없는 외부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자명하여 모두가 공감하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명제이다.

 

결국 예술가의 감성 또한 바깥 세계와의 부단한 부대낌을 통해 형성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편 예술가의 감각은 세계와 관계를 서로 주고받는다. 세계는 예술가의 감각이라는 나무를 길러준 대지와도 같아서 그의 감성에는 세계의 속성이 잠들어 있다. 예술작품에서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의 보편적인 구성원리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이데거가 고흐의 작품에서 세계의 출현이나 존재의 의미를 보는 것이 그 예가 되겠다. 한편 세계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여 형성된 예술가의 감성은 다시 한번 세계를 새롭게 읽어낸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의 창작행위는 근원적으로 세계와의 교감이며 감각은 그 세계에 대한 교감의 기술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뛰어난 감각’, ‘세련된 감각’ 등 구본창에게 따라붙는 수사는 교감의 테크닉을 말하는 것인가. 교감은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 때는 나와 타인, 자아와 타자, 인간과 세계의 구분도 함께 사라진다. 차이는 세계의 구성원칙이자 각 개별자들의 존재를 지탱하는 원리이다. 교감이 이러한 원칙의 내부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차이를 유지하면서 실행되어야 한다. 실제로 일상의 주변이나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수한 종류의 교감들에는 의심과 이의, 대립과 충돌이 함께 섞여있다. 교감은 순간적인 동의나 즉각적인 수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타자의 본성과 화해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교감은 타자와의 대립을 화해와 공존의 길로 열어나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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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에, 1991

 

 

 

앞에서 열거한 구본창의 초기 작업은 교감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자아를 확인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겠다. 몸부림은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어서 그 행위에는 절제가 있을 수 없고 치장이나 꾸밈과 같은 형식의 가식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능적 충동에 가까워 반성적 사유나 차분한 성찰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분출되는 거친 행위, 요컨대 정신의 행위가 아니라 몸의 행위이다. 하지만 자아 확인의 성격을 띠고 있는 구본창의 초기 사진은 감성의 지시에 따라 절제하는 몸부림에 가깝다. 매우 정교하게 이미지를 구성하는 세부적인 요소들까지도 자신의 감성에 부합하는 형태로 구성해내는 그의 작업방식이 이미 그 점을 말해준다. 이는 그가 대상에 대한 심미적 판단을 감각의 도움을 받아 즉각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이 자신의 취향이나 정서, 나아가 자신이 의미를 두고 있는 가치나 신념, 때로는 세속적 질서나 역사적 전망 등에 비추어 만족할만한 것인지의 문제까지도 치밀하게 고려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지성을 감성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감각을 이지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에 가깝다. 칸트는 심미적 판단이 관심이나, 개념, 욕구, 목적 등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순수미의 존재를 주장했지만 인간의 미에 대한 판단에는 세속의 차원에서 그가 배제한 위의 조건들이 흔히 개입함을 발견하게 된다. 아름다움이 세속과 무관하다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심미안은 질 낮고 천박한 것이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칸트의 언명은 한편으로 순수미와 부수미, 내재미와 외재미 등을 구분하여 심미적 판단의 참된 규칙을 찾아내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사람들의 미에 대한 친화력은 세속의 질서에서는 기능과 용도에 더 쉽게 이끌리는 경향을 보인다. 칸트가 순수미의 예로 제시하는 즉흥변주의 경우만 하더라도 협화음에 익숙한 감상자들의 귀에는 정신을 어지럽히는 소음처럼 들려 난청의 상태가 되기 십상이다. 즉흥변주를 자주 구사하는 재즈 연주자들도 음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막막한 여행의 시작과 끝을 주어진 멜로디로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후기의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처럼 말이다. 한편 아예 규정된 멜로디 자체를 배제하고 카오스의 세계를 정처 없이 항해하는 오네트 콜먼(Ornette Coleman)이나 세실 테일러(Cecil Taylor) 등의 음악은 감상자들에게 감성의 고통을 일깨워준다. 감각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끝없이 몰려오는 비 규정성의 음들은 예측에 따라 감각과 조화를 이루어 표상의 만족을 느끼고자 하는 의식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칸트가 몰형식적이라고 말한 것은 비단 순수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숭고의 감정을 조건 짓는 요소라서 이처럼 규정된 형식을 넘어서는 경우나 고통에서 비롯되는 만족을 설명하는 전거가 될 수도 있겠다. 안온한 만족보다 감성을 극도로 고양시키는 파토스적인 예술이 이에 해당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심미적 판단에는 훈련이나 학습과 무관한 선험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성을 형성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쳤던 수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구본창의 감성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타자와의 반목과 화해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세계의 선물이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밀쳐낼지를 결정하는 것은 순수 자아의 몫이어서 그의 감성에는 선험적인 요소도 섞여 있겠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세계의 속성, 혹은 타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이 깃들어 있다. 모든 이의 감성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의 감성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가 한 사람의 감각에 공감한다고 해서 탁월한 감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평균의 감각, 이를테면 보편성에 호소하는 일반의 감각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이 게시물은 권학봉님에 의해 2018-04-04 21:05:40 사진조명 동영상 강의에서 복사 됨]

6 Comments
22 비목어 2015.09.08 05:02  
읽었는데요.... 벅차요....
평론글은 어찌이리 읽으면서 숨쉬기 힘든지....모르겠어요...
좋은자료 감사하구요.....
다시한번더 읽어야 하겠네요,,,,아직 사진에 대한 깊이가 짧아서요
자료 감사합니다......
25 stormwatch 2015.09.08 23:04  
놀면서 하십시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잘 노는 사람이 사진도 재미나게 가지고 노는것  같습니다^^;

항상 관심 있게 봐주시니 감사할따름입니다
M 운영자 2015.09.09 13:53  
우리시대 가장 작가적인 구본창의 평론이네요.
글이 조금 현학적이라 어렵지만,
그의 작품세계 특히 초기의 10여년간 고군분투에 대해서 조금더 알아간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는 스톰워치님께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25 stormwatch 2015.09.10 22:50  
저도 공부 되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22 비목어 2015.09.17 09:23  
이글 2편 빨리올려주세요.....
항시감사합니다.
1 태양토 2015.09.20 17:52  
양질의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