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독재-구본창의 탐미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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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독재-구본창의 탐미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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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이어집니다>


 


감각의 독재 - 구본창의 탐미주의(2)


 


글/박평종(미학/사진비평)<월간사진 2008년 3월호>


 


감각의 초월적 차원  


거칠게 분출되는 내적 충동을 감각적으로 형상화시켜내고자 했던 구본창의 초기 작업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화의 징후를 보여준다. <Good Bye Paradise>, <숨>, <Ocean>, <White>와 같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거친 형식실험이 최소화되고 과포화 상태의 자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 차츰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조짐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감각의존도가 높은 작가에게 감각 대상으로서의 세계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궁무진한 영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항상 감각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관계로부터 창출되는 운동이다. 감각 대상이 없는 감각이 어떤 것인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을 만큼 감각은 대상 의존적이다. 하지만 감각 대상이 항상 구체적인 사물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명쾌히 잡히지 않는 추상 또한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베이컨과 같은 화가는 감각 자체를 감각의 대상으로 그려내려 한다고 들뢰즈는 말하고 있다. 때로 예술작품은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 요컨대 감각해낼 수 없는 대상들마저 형상화시켜내려 한다는 점에서 감각의 지평을 무한히 넓혀나간다. 한편 뒤샹이 제기한 시각중심 회화에 대한 비판 이후 예술은 개념을 구체성을 통해 감각 대상으로 형상화시켜내는 작업으로 변화해나가기도 했다.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감각해낼 수 없는 대상은 그래서 형상화를 위한 노동이 극복해내야 할 과제처럼 주어져 있기도 하다. 그 난제가 한편으로는 예술을 기예와 형이상학의 중간 지점 어딘가의 모호한 지점에서 서성거리도록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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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1995

실제의 삶 속에서, 현실 세계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이란 예술작품에서 체험하는 그것에 비해 훨씬 풍요로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술작품이 현실 자체에 대해 존재론적 결함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철학자들의 생각을 빌지 않더라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삶에서 체험하는 감각의 결이 지닌 풍부함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삶의 미세한 디테일을 감각의 수면 위로 띄워내기 위해 오래도록 몸부림쳐왔지 않던가. 구본창의 감각은 세계의 미세한 결을 잘 붙잡아낸다는 점에서 예술의 고전적인 지혜를 효과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감각의 역할은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따라 구체적 현실을 붙잡아내는 차원에 머물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작가의 지위를 탐미주의자로 규정하게 만든다. 감각의 기본적인 활동은 감각의 대상과 감각의 주체를 단순히 중재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가장 원초적인 감각의 역할이라 하겠다. 감각은 늘 현재의 사태이며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주어진 현상만을 대상으로 삼지만 그와 더불어 확장성도 같이 갖는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꽃 한 송이에 대한 감각은 우선 꽃의 색깔과 크기, 향기 등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꽃에 대한 감각은 다시 꽃을 피워낸 대지와 자연에 대한 감각으로 확장되며, 나아가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이 다시 한번 확장된다면 꽃을 자연의 난폭함으로부터 보호하며 길러내기 위해 인간이 쏟아 부은 땀과 정성까지 포함하게 될 것이다. 감각은 대상과의 단순한 만남도, 심미적 취향에 따른 가꾸기만도 아닌 셈이다. 이를 우리는 감각의 확장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하다. 요컨대 감각의 깊이란 감각 대상을 키워낸 세계의 존엄성을 함께 느끼는 데 있고, 그 두께는 감각 대상이 자라난 세월의 무게를 풍미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감각이란 자신을 길러낸 모든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활동이다. 이처럼 자신이 붙잡아내는 눈앞의 사태를 넘어서는 힘을 우리는 감각의 초월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겠다. 바로 이 초월적 차원으로 인해 감각은 판단력이나 논리적 사고, 이성의 활동에 비해 신비한 정신처럼 여겨지는 듯 하다. 자명하게 주어져 있지 않은 저 너머의 무엇을 순간적으로 감지해내는 힘을 보통 직관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기초 감각이 반복적으로 쌓인 데서 나온 것이다. 반복과 축적은 판단의 속도를 단축시켜 결국은 현상에 대한 순간적인 감각과도 유사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직관은 감각과 판단이 동시에 섞여서 이루어지는 사태이다. 감각의 초월적 차원을 신통하게 여기는 것은 이처럼 축적된 체험에서 오는 직관을 갖지 못한 이들의 편에서 나온 생각이다. 결국 진정한 감각은 재주가 아니라 힘이다.


 


심미적 취향의 윤리 


감각의 초월적 차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관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감각의 주관성이란 본래 그 자체로서는 무고한 것이다. 한편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이들의 감각은 존중받을 자격을 지니며, 반대로 하나의 감각은 그 감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다른 감각들의 숱한 이의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감각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어떠한 다른 정신활동보다도 주관적이지만 주관성이라는 표현은 본래 신체의 활동에 가까운 감각보다는 심미적 판단의 성격을 규정할 때 더 적합한 말이다. 칸트는 심미적 판단의 본성이 주관적인 데에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다시 한번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형용 모순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거기에도 보편적인 규칙이 있음을 변론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때의 보편성이란 공통감각이라는 개념적 전제 하에서 나온 것이지 경험적 차원에 토대하는 것이 아니어서 개별 주체들의 심미적 판단만을 놓고 보자면 이는 여전히 주관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주관성의 문제를 고려하자면 구본창의 작품을 거론할 때 흔히 따라붙는 수사인 감각이라는 표현은 좀 더 엄밀히 말해 작가의 심미적 취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적합할 것 같다. 근작에 해당하는 <백자> 시리즈에서 볼 수 있듯 작가는 대상을 엄밀하게 재현해내기보다는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따라 시각적 수사를 활용하는 데 더 많은 정성을 쏟는다. 그가 사용하는 시각적 수사는 때로 백자의 이름을 결정하는 흰색을 연조의 분홍빛으로 변형시킬 만큼 과감하여 이를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작가의 주관적 취향 혹은 독창적 해석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개인의 주관 또한 정당성 여부에 대한 판결의 도마 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가치가 작가의 주관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은 고전이 일러주는 교훈처럼 온당하다. 그래서 작가의 주관성을 흔드는 모든 획일화의 움직임이나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는 예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마땅하다. 다만 주관성은 지키되 그것이 독선으로 나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 건강한 주관과 독선의 경계란 매우 모호하여 때로는 입장이나 강도에 따른 차이만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주관성의 윤리가 요청된다. 대상을 자신의 주관성에 따라, 다시 말해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따라 시각적으로 해석해 내는 구본창의 작업에 어떤 윤리적 잣대를 적용시켜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미의 개념에도 여럿이 있고 마찬가지로 윤리의 개념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물어야 할 것은 심미적 취향이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미를 판단해내는 능력을 심미적 취향이라고 정의할 때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심미안이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설이 가능한 까닭은 비록 개인들의 심미적 취향이란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의 이상적인 형태를 모두가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전제 때문이다. 심미적 취향과 미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고전적인 것으로, 여기에는 미 개념에 대한 축소된 이해가 깔려있다. 구본창의 작업을 지배하는 미의식도 이와 유사한 것 같다. 미를 심미적 주체가 느끼는 표상의 만족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멀리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만족과 쾌의 감정은 근원적인 이끌림이어서 인간은 불만과 불쾌를 참아내지 못한다. 미의 결핍을 추함으로 정의한다면 미란 만족과 쾌를 불러일으키며 추함은 불만족과 불쾌를 수반한다. 따라서 미의 추구는 본능에 속한다. 하지만 사람의 미의식이란 이처럼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부합하여 만족과 쾌의 감정으로 주어지는 대상만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에스테티카는 감성론으로 출발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미의식은 고도로 복잡한 지성의 활동이어서 표상의 만족을 지향하는 감성적 판단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지식, 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한 이해,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등 이성적인 사유까지도 포함한다. 나아가 진리에 대한 과도하지 않은 욕망이나 정의의 실천을 향한 용기, 타인에 대한 존중의 윤리까지도 끌어들이는 복합적인 의식이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우리는 생김새가 예쁜 사람에게서만 만족과 쾌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진리를 추구해나가는 고결한 지성이나 자기를 헌신하는 정의로운 인간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심미적 취향이라는 말은 미의식이 포함하는 다양한 범주들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표현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미에 대한 판단의 능력을 뜻한다면 적어도 이를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어야 한다. 진리나 정의, 역사 등과 같은 문제는 주관성의 차이에 따라 판단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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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오광대, 2002

구본창의 미의식이 이와 같은 총체적 고려 속에서 나온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형상만을 가지고 파악해내기 어렵다. 형상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형상이란 그래서 우둔한 것이다. 작가가 제안하는 형상들은 단지 감성에게만 말을 건다. 그 형상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심미적 취향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성적 판단이란 미의식과 달리 심미적 대상에 대한 총체적 고려를 하지는 못한다. 가다머는 칸트를 따라가면서 미의식이 역사의식과 섞이지 않은 상태에서만 순수한 심미적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결국은 그것이 절름발이식 미의식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형상의 아름다움이란 개념적 판단이나 역사적 판단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심미적 판단일 수는 있어도 미의식이 원하는 진정한 욕망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눈은 잡아끌지언정 감동의 파장은 가슴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탐미주의자의 한계를 만든다.
본래 아름다움에 대한 이끌림은 무고할 뿐만 아니라 물리적 세계를 비로소 인간의 세계로 만들어주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에 대한 욕망은 기능이나 유용성에 대한 요구와 달리 만족의 끝을 갖지 못한다. 레비나스는 욕망과 필요를 구분하여 필요가 충족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임에 비해 욕망은 충족되는 즉시 또 다른 대상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욕망은 무한을 향한 움직임이며 궁극적인 대상을 갖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차원 바깥을 더듬어나가면서 존재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차원이 아님을 역설하는 그에게 무한을 향한 욕망은 이를 입증하는 핵심어 중의 하나가 된다. 미에 대한 이끌림이 이러한 욕망의 범주에 속한다면 미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확장의 길이자 초월의 길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미인지가 관건일 따름이다. 윤리와 충돌하는 초월의 길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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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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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2006


 


<백자> 시리즈에서 작가가 보여준 주관적 해석은 때로 독선적이다 싶을 만큼 과도하여 그에게 여전히 초기 작업을 지배하던 배타적 자의식이 남아있음을 짐작케 한다. <백자>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2000년대 초반의 작업 <탈> 시리즈 또한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전통문화의 유산을 기록하는 데 충실했던 기존 사진가들의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탈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에 몰두했다. 그 해석이 목표했던 것은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듯 “한국 민속의 전통에 잠재된 깊은 슬픔의 반영”과, <Good Bye Paradise>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박제와도 같은 느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탈이 슬픔의 상징이 될 수 있는지, 박제와 유사한 사물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내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다. 민속학 관련 사진이 대개 민속학 연구를 위한 자료의 차원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송석하의 경우는 이 분야의 선구적 업적이다) 구본창의 작업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렇다면 전통문화의 해석에 개인의 심미적 취향이나 주관이 개입할 수 있는 한도는 어디까지일까. 작가는 이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 탈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 역할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언급하고 있다. 작가가 의도했던 바만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각각의 탈 하나하나는 모두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지녔다. 어떤 탈은 작가의 견해처럼 슬픔의 상징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경우는 환희와 쾌락, 위엄과 해학, 혹은 기지와 위트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종류의 탈이 작가의 의도처럼 슬픔의 상징이나 박제된 주검을 가리킨다면 이는 주관성의 이름 하에 저질러지는 획일화와 왜곡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전통문화란 개인의 감성이나 견해, 의지 등 주관성을 가리키는 모든 정신 활동의 자유에 내맡겨져도 상관없는 사물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전통 속에서 살아온 모두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의 주관성이 옹호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주관성 또한 보호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작가의 주관성 또한 위험에 빠진다. 이는 자아와 타자의 변증법을 통해서 쉽게 입증된다. 내가 자아라면 타인 또한 자신의 자아를 갖고 있어 그에게는 내가 타자가 된다. 그래서 나의 자아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타자의 자아를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윤리의 가장 평범한 출발점이다. 타자에 대한 존중 없이는 나 또한 존중받을 수 없어서 윤리란 곧 나에 대한 존중이기도 한 셈이다. 전통문화에 대해 개인의 주관성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주관성에 대한 존중이 함께 따라야만 한다. 주관성의 권리란 언제라도 타자에 대한 폭력, 곧 전체에 대한 폭력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것은 곧 타자의 권리가 내게 폭력이 될 수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렇다면 타자에 대한 존중이 주관의 축소를 전제해야 하는 이상 주관성의 표현을 근간으로 하는 모든 예술은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는가. 완전한 윤리의 실천을 향한 길이 주관성을 지우는 데에 있다면 그것은 침묵의 언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현자들은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이 길은 아니다. 에둘러가도 길인 것이다. 나와 타자가 공감을 얻어내는 것, 나와 세계가 교감하는 길을 찾는 것 또한 윤리를 실천하는 현명한 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나의 주관과 타자의 주관이 충돌하는 지점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이나 교감에 반목과 충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때의 충돌은 다시 화해로 옮겨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대상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요구한다. 자신의 감성이나 견해에 대한 충실이 아니라 대상의 본성에 대한 충실함만이 여럿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윤리의 길은 진실의 길과 만난다. 미의 이상이 공통감에서 오는 것이라면 미의 길은 같은 이유로 다시 한번 진실의 길과 겹친다.
구본창의 사진에 많은 이들이 매혹당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공감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모든 공감의 근원은 대상에 대한 유사한 판단을 기초로 하는 것이어서 그 공감이 솔직하다면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 보편적인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있으므로. 한편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독선은 진실을 해친다. 감성의 진실은 개념적 진실과 달리 복수적이다. 반대로 개념적 진실은 하나이다. 그리하여 개념적 판단에는 독선이 끼어들 수 없지만 감성에는 쉽게 개입하는 것이 그것이다. 감성은 주관성을 특질로 하는 까닭에, 다른 한편으로는 복수적 진실을 갖는 까닭에 쉽게 독단에 빠진다. 감성의 독선이 진실의 적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실에 반하는 감성의 독선은 공감을 얻을 수 없어 폐쇄적 주관성의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다. 탐미주의자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미의 보편적 진실을 보지 못하는 독선이란 허구적 미의식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끝>

 

 

 

 

 

 

 

 

 

 

 

 

 

[이 게시물은 권학봉님에 의해 2018-04-04 21:05:40 사진조명 동영상 강의에서 복사 됨]

6 Comments
22 비목어 2015.09.20 04:04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25 stormwatch 2015.09.20 18:39  
네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요
1 태양토 2015.09.20 18:14  
두번째 글 또한 감사히 읽고 갑니다.
25 stormwatch 2015.09.20 18:39  
관심있게 봐주셔서 다행입니다

좋은 말씀 또한 감사드립니다
M 운영자 2015.09.22 01:29  
아.. 멋진 내용의 글이네요.
이렇게 사진가의 내면세계를 탐구해서 나름의 추측과 설명을 덧붙여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게 놀랍기만 합니다.
항상 좋은 내용의 글 올려주셔서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5 stormwatch 2015.09.24 10:20  
넵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