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사진의 전근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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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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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말은 그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말이 쓰이게 된 이유에서부터 말한다면 그와 같이 이해한다는 것은 적합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는 살롱픽쳐 또는 살롱사진이라는 말은 전후 아마추어 사진계의 대부분이 리얼리즘을 지향하고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환영하게 되고, 그 일반적인 경향은 질적으로 심히 변모해졌을 무렵, 새로운 방향으로 의욕을 불태우는 지도부들이 종래의 보수적인 예술사진에 대해서 제법 비판적인 것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사정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종래의 보수적인 예술사진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아마추어 사진예술의 주류를 이루어온 픽토리얼 포토그래피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이와 같은 종류의 작품에 있어서 현실도피적인 화조풍나적 발상방법, 나아가서는 그 형식에 있어서 회화적 구도주의나 의화적인 표현에 의한 고풍적인 정서의 찬미는 더욱이 기록성을 중시하고 현실을 직시하려는 전후의 새로운 사진계의 풍조에서 본다면 구태여 살롱이라고 비꼬아서 부르기에 알맞은 부정적인 미학이었다는 것이 살롱픽쳐라고 하는 말로 쓰이게 된 어원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파와 보수파에서는 이 말에서 받는 어감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전자는 약간 경멸적인 것으로 쓰고 후자는 오히려 만족하면서 쓰고 있다. 따라서 픽토리얼 포토그래피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하지만 그 어원을 말한다면 전전에 쓰이는 예술사진이나 픽토리얼 포토그래피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는 보류로 하고 살롱픽쳐란 픽토리얼 포토그래피의 연장이라는 일반적인 해석에 따라서 현대의 사진표현과 상이성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픽토리얼 포토그래피의 역사는 제법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사진발명초기의 곤란한 시대가 지나고 대충 제작과정의 기술적 과제가 해결되어지고 사진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사진가들이 의욕을 불태우게 된 19세기 말엽부터 점차 감행되어 더욱 20세기 초에는 최고조에 달하고 세계의 사진계의 대세를 지배하던 사진예술 사조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그 풍조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정확한 연대를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해방 전 10년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픽토리얼 포토그래피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사진의 기계성이나 화학적인 것은 예술의 전면적인 창의의 박탈이라고 생각하고 회회의 포즈나 구도를 답습하고 심지어는 그 「마티엘」까지도 모방을 하면서 마치 인상파회화가 대기와 빛으로서 형상을 표현하려는 양 보드라운 선의 묘사나 안개가 덮인 것과 같은 「톤」의 효과를 즐겨 쓰며 그와 같은 수법을 적극적으로 사진표현에 도입하는 것으로서 사진의 예술성을 확립하려는데 있다. 따라서 회화주의적인 예술사진에는 카메라의 눈에 비치는 혈실의 기록적인 관찰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물체주의로부터도 멀리되고 『사진의 주의는, 꼭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도 중요한 것은 흑에서 백에 이르는 농담의 밸런스라고 하겠다.』라는 식의 기술주의를 구가하고 더욱 회화적인 구도를 중시하는 형식주의가 감행되어졌다. 즉 형식적인 면에서는 다분히 동양화적인 공간구성으로써 독자적인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픽토리얼 포토그래피, 즉 회화주의적인 사진의 혈통을 이어받은 작풍은 대전직후는 물론 오늘날에도 계속 아마추어 사진계에 뿌리 깊이 남고 있다. 옛날과 같지는 않지만 아직까지 그 세력은 대단하다. 말하자면 이것을 살롱픽쳐라고 하고 있으며 그 작품의 특징은 본래의 픽토리얼 포토그래피와 비교해서 거의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옛날과 같이 특수한 기법을 사용하고 또는 소프트 포커스의 렌즈를 사용하는 등 더구나 안개가 낀 것처럼 연조묘사나 판화적인 터치의 맛을 흉내 낸 표현을 하는 따위는 오늘날 자취를 감추어 볼 수 없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도 표현형식의 면에서도 명백히 픽토리얼 포토그래피의 연장이다. 그 이미지는 여전히 현실도피적인 분위기주의고 화조풍나적인 심미관에서라고 하겠다. 거기에는 새로운 시대감각이나 금일적 사고 같은 것을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살롱픽쳐의 경우는 분위기 위주의 자연관찰 같은 것이 많고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데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자연의 경치를 대상으로 하기만 하면 모두가 살롱적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이다. 가령 자연만을 전문적으로 찍어온 미국의 유명한 사진가 애드워드 웨스턴의 작품에는 살롱적인 것과는 이질적으로 자연에의 엄격한 응시를 볼 수 있으며 거기에서 생기는 강열한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요컨대 살롱픽쳐에는 생생한 현실의 인간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것보다 자연의 미관 쪽이 그 고풍적인 미의식의 특징 면에서는 쉽게 표현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오늘날 이러한 살롱 픽쳐는 사진예술의 주류가 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하루 빨리 우리 사단에서 사라져야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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