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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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8

25 stormwatch 1 2015 2 0

 

 

 

여덟 번째 테마 사진적 행위와 감각의 논리

 

사진 예술은 주체와 무의미를 지향하지만 결코 의미나 객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식과 공통된 감각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배경을  만든다.

왜냐하면 진보는 배경 없이 존재하지 않고 배경은 진보를 위한 모태이기 때문이다.

 

3076066253_QtrkFxl5_b6482deaac8f29e49e5dc03271677e06837b6248.jpg그림을 그린다든지 사진을 찍는다든지 디자인을 한다든지 혹은 영화를 만든다든지  창작을 위한 모든 예술적 행위는 그 시간적인 진행 과정에서 볼 때 시작과 완성이 있다. 그래서 예술적 결과물로서 완성된 작품은 필연적으로 그 동기와 원인성을  갖는데 그것은 “재현”이라는 창작적 행위의 가장 시원적인 출발점이 된다. 특히  사진예술에서 복사적 진술로 나타난 결과물은 이러한 출발점과의 기호학적인 문맥에서 다소 분명히  설명된다 : 찍혀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의  기호학적 관계는  앞서 언급된 테마에서 보았듯이 도상(icon), 상징(symbol) 그리고 지표(index)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사진을 도상과 상징의 관점에서 볼 때 작품의 출발점이 되는 원인성은 그것이 도상적이든 상징적이든 혹은 은유적이든 여하간  구체적이고 특정한 대상(일대일의 대응)을 지칭할 수 있는 의미(혹은 양식 bon  sens 예를 들면 생명력, 자연보호, 동심, 인본주의)에  관계한다. 이때 대상에 투영되는  작가의 의식은 객관적이다.


  그러나 사진을 물리적 원인관계 즉 하나의 자국(인덱스)으로 보는 관점에서 찍혀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과의 관계는 상징이나 은유가 아닌 물리적 원인관계(일대 다수의 대응)에 놓이고 그때 시원적인 원인성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형이상학적인 어떤 존재, 즉 감각의 음색(tonalit) 혹은   인상(impression)으로 출현한다. 다시 말해 이는 존재의 생성-진화(devenir-forme) 과정에서 작가의 감각에 의해 포착된  “생성(genese)” 혹은 “싹(germe)”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결국 이러한 감각의 생성으로부터 시각화된 단편적 징후로 간주된다.

 

이때 사진적 메시지는 사진이 외시하는 대상이 아닌 언제나 대상에 대하여 작가 자신이 최초로 포착한 추상적 음색 혹은 인상(대상과의 교감)에 관계하는데 여기에 투영된 의식은 의심할 바 없이 주관적이다. 이와 같이 사진을 작가 고유의(주체적) 감각으로부터 재현된 단편적인 시각적인 징후로 볼 때 사진의 대상은 결국 보이지 않는 그러나 거의 무의식적이고 직감(intuition)적인 작가의 감각에 의해 포착된 형이상학적인 존재들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진의 비평은 사진 위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출현하게 한 형이상학적 배경(fond) 위에 있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언급해 보면, 우선 용어에  있어 감각의 음색, 탈 코드, 탈 의미 혹은 무의미, 형상이탈(deconstruction) 등은  철학적 관점에서 본 존재론적 용어들로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성과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개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개념들은 규정할 수 없는 그러나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사실이나 현상을 말한다. 또한 이는 지극히 사변적인 용어들로 대부분의 경우 공통적으로 감각으로만 설명되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대상(과학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사진에 있어 이러한 개념의 가장 대표적인 용어는 알다시피 바르트의 푼크툼이다.


  푼크툼에 관하여 앞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스투디움)과 사랑한다는 것(푼크툼)은 분명 다르다. 전자의 지시대상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분명한 의도나 지칭성을 가지고 있는데 언제나 의미(언어의  속성으로서 signification)라는 논리의 범주 속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후자는 얽혀진 감정의  실타래 속에서 일반적으로 규정된 단순한 애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의미를 넘어서는 미묘한 감정의 음색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가령 이 여자를 왜 좋아하느냐에 대한 대답은  다소 분명하게 그 이유와 동기를 가질 수 있고 또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타인의 공통된 공감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구체적이고 분명한 논리적 설명과 이유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러한 대답은 마치 백화점에서 치수에 맞는 기성복을 사 입듯이 사실상 외부로부터 길들여진 논리 즉 앎으로부터 형성된 객관적 의미의 진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여자를 왜 사랑하느냐에 대한 대답에서는 자신이 아무리 치수에 맞는 기성복을 골라 입어도 치수와 치수 사이에 끝없는 뉘앙스가  존재함을 발견할 것이다. 사랑의 원인은 마치 사람의 얼굴이 각자 다르듯이 각자 그 배경에  따라 다를 것이다. 흔히 우리들은 사랑한다라는 것을 흔히 좋아한다라는 논리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첫 사랑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의 무한한 음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사랑이라는 감정의 음색 그것은 이성과 의미의 영역을 이탈한 영역에서 논리적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미묘한 감각의 존재이다. 이때 자신이 체험한 감각의 음색을 사진적 형태로 재현하는 것은 결국 비물질적인 것을 물질화 하는 행위로 간주되며 이러한 행위를 “사진적 행위”1)라고 한다.


  사진을 찍는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도 역시  두 부류의 사진적 의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 “왜 찍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 혹은 공통된 명분(I like)으로서 나타난 사진과 “왜 찍는가”에 대한 모호한 대답(I love)으로서 출현한 사진(사진적인 것)은 다르다. 전자의 경우가 명분과 이슈를 위한  진술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여러  번 앞의 테마에서 강조하였듯이) 비록 사진이 대상에 대하여 어떠한 변형도 허락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ca a ete)”의 진술적 형태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조짐을 보이는 징후(index)”로서의 사진적 재현2)이다.

 

 또 그 징후의 원인 혹은 배경이 되는 것 즉 찍혀진 대상의 실질적인 지시대상은 의심할 바 없이 작가의 본원적인 감각의 음색(본질)으로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일종의 추상의 형태(푼크툼의 실체)를 가진다.  그때 사진은 “사진적 추상을  위한 단편”(사진 1)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사랑한다”라는  표현(의미의 이탈 non sens)을 “좋아한다”라는 분명한 의미(양식 혹은 틀 bon sens)로  무장하듯이 흔히 사진적 행위에서 진술과 재현을 혼동하고 있다.


   “왜 그녀를 사랑하느냐 ?” 혹은 “왜 이 음악을 좋아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왜 찍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도 근본적으로 설명 불가능하다. 그래서 의미적인 눈으로 볼 때 작가의 사진은 언제나 주관적 논리 속에서 마치 뜬구름 속에 출현한 모호한 실루엣처럼 나타나고 또한 관객의 객관적 눈으로 볼 때는 사실상 하나의  수수께끼일 뿐이다. 이때 작가의 사진적 행위는 자신의 순수 체험을 통한 감각의 음색을 시각화하는 행위(특히 추상화에서)로 간주된다(이를 “내재적 형상의 재현” 또는 “외재화된 감각의 음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거의 모든  창작적 행위를 작가의 본원적 음색(생성)의 시각적 재현으로 보는 관점을 흔히 “존재론적 예술론”3)이라고 한다. 이는 평범한 논리와 인식을  가진 우리들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것들로 그 공통 분모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의미의 이탈과 주관적 혹은 주체적(철학적 용어로서) 의식이다.


   우선 의미의 이탈은 곧 이성의  칼날 밑에 잠 재워진  음의 세계에 대한 감각적 발견인 동시에 흔히 “형이상학적 회기” 혹은 “상상으로의 복귀(미셀  푸코)”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사변적 발견은 사실상 새로운 패러다임의 양식(bon sens) 혹은 보편화된  철학적 양상이나 또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의미의 과잉 혹은 결핍 그리고 역설(paradoxe 즉 고착된 의미의 전복) 등의 형이상학적 발견을 말한다. 예컨대 사랑의 감정, 음악의 환희 혹은 자아실현의 희열과 같이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그러나 존재하는 감각적인 것(무의미 non sens)들을 말한다.4) 사진으로 자신의  체험적 음색(탈 의미)을 재현한다는 것은 “좋아한다”라는 사실의 논리적  진술이 아닌 “사랑한다”라는 감정에 대한 내적 재현과 유사하며 또 그러한 내재적 음색과 그 음색으로부터 재현된 예술적 생산물 사이의 감각적 일치(교감 correspondance)는 우리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소위 황홀경(extase)이나 레키쇼(Requichot)와 같은 비 현실적인 경험까지도 유발시킨다5).


  존재론적 예술론에서 창작은 곧 작가의  주체의식이고 재현은 이러한 의식의 시각적 출현을 말한다. 다른 예술적 매체와 마찬가지로 사진에서도 작가의 주관(주체)적 의식 즉 작가 고유의 감각적 음색은 작품의 근본적인 출발점 즉 “생성”이  된다(이러한 생성이 사진에 의해 누설 될 때 “자동생성”이 된다). 만일 사진적 행위에서 작품의 출발점이 자연을 위협하는 인공물, 강인한 생명력의 예찬, 삶의 애환과  인간미 등과 같이 작가의 주관적 의식이  아닌 지극히 타당한 객관적 의식이라면 혹은 작가가 사진의 대상으로서 선택된 구체적인  명분이나 다소 분명한 상징들, 예를  들어 지하철 역 구석에서 잠자는  노숙자, 투쟁하는 노동자의 절규, 쉬고 있는 진압 경찰의 담배, 궁궐 같은 예식장, 젊은이들의 코고리나 배꼽고리 또 그들의 천연색의 머리와 찢어진 청바지 등을 보여 주는 사회적 문화적 코드 속의 사진들이라면 결과물로 출현한 사진과 대중과의 관계에서 사진의 역할은 결국 코드(외재화 된 코드 혹은 양식)의 전달에 있고 또한 그때 작가의 역할은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나 창안(내재적 코드 혹은 무의미의 발견)이 아닌 단순한 전달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럴 경우 엄밀히 말해 진정한 창작으로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명분을 풍기는 사진적 이슈 앞에서 창작의 꼬리표를 달아 주고 또 그러한 명분을 포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래 동안 우리를 지배한 소위 정답이라는 절대적 객관(의미)성과 조형적 미를 모델로 하는 창작의 틀(붕어빵)로부터 나온 결과이다. 

 

 근본적으로 대중과의 교감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이나 작가의 주체의식이 결여된 사진은 물론 지나친 비유가 되겠지만 마치  대중가요를 참된 예술작품으로 간주하지 않듯이 엄밀히 말해 일종의 대중사진으로  볼 수 있다. 역으로 이 말은 곧 “진정한 예술사진은 언제나 대중의 눈에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만족의 사진 혹은 대중의 눈에  전혀 읽혀지지 않는 사진들은 사실상 수수께끼일 뿐인데 이럴 경우 흔히 대중과의 관계에서 작가의 기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야기 시킨다.


  엄밀히 말해 사진의 세계에서 이러한 두 경향(객관과 주관  혹은 의미와 무의미)은 모두 나름대로 공존한다. 그들은 어떤 흑백논리에 의해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지향성을 가질 뿐이다. 사진 예술은 주체와 무의미를 지향하지만 결코 의미나 객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식과 공통된 감각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배경을  만든다. 왜냐하면 진보는 배경 없이 존재하지 않고 배경은 진보를 위한 모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 위에서 역사의 획을 긋는 많은 선구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의 창작은 대중의 눈 높이를 뛰어 넘으면서 언제나 자신의 주체적 의식에서부터 형성되었고 또 그러한 주관성은 우리 모두에게 공유된 은밀한 메시지였다.

 

<주>
1) 사진적 행위(L'acte photographique)는 단순히 결과물로 나타난 물질적인 사진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사진적인 방법(특히 카메라)을 이용하여 창작적 행위를 실행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그래서 사진적 행위의 개념적인 이해는 언제나 인덱스적이며 이러한 행위로 나타난 “자국”을 생성물로서의 사진 즉 “사진적인 것”이라고 한다.


2) 사진적 “재현”은 또한 누설과 폭로의 의미로 이해되는 하나의 장치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를 “사진적 장치(Le dispositif photographique)”라고 한다. 참고, Jean-Marie  Schaeffer, L'image precaire  du dispoditif photographique, Edition du Seuil, Paris, 1987.


3) 예술 작품을 보는 관점에는 철학의 큰  두 담론인 인식론적 관점과 존재론적 관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작품으로 나타난 결과물에 대한 의미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을 중요시하는 방법론이다.


   이는 물질을 우선으로 하는 실용적 예술론으로 특히 유물론적 예술론에서 모든 예술은 하나의  생산물로서 대중과의 교감을 강조한다. 그러나 후자의 방법론인 존재론적 예술론은 물질적 결과로서 나타난 작품보다 창작의 출발점이 되는 작가의 비물질적인 생성 혹은 원인성을 중요시하는 방법론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인 작품으로 출현하게 하는 작가의 본원적인 감각을 우선으로 하며 그때 예술적 행위는 언제나 비물질적 대상을 물질화하는 작업으로 간주된다. “사진적인 것”을 말하는 사진의 인덱스(징후)는 존재론적 예술론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존재론적 예술론은 그 역사와 관점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구조를 요구하는 인식론의 획일적인 논리로 인해 오래 동안  예술분석에 있어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반된 두 관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적 담론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의미 중심의 사고에서 (생성)존재론적 담론으로의 의미적 이동 혹은 이론적 절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을 존재론적 맥락에서 이해하지는 않는다. 또한 탈 의미의 대상을 지칭하는 모든 감각적 존재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재현적 대상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성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태적인 의미의 옷을 입지 않고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제나 인식의 확장(인식되는 존재에 대한 끝없는 의미화) 속에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4) 양식(bon sens)과 무의미(non sens)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언급된다. 전자는 의미를 생산하는 어떠한 패러다임에서 하나의 방향성이 부여되도록 반복적으로 계열화 된 것을 말하며, 후자는 그러한 양식에 의해 고착된 의미와 한 사회의 공통된 감각(doxa)을 넘어서는 역설(paradoxe) 즉 탈 의미를 말한다. 


5) 이러한 개념들은 거의 신비주의에 가까운 정신적 상태를 말하지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병리학적 혼수 상태나 무의식과는 전혀 다르다. 마치 마약에 의한 환각상태와  같이 감각에 의한 일종의 정신적 도취(gemut)로 종교적 개념의 무아지경과 비슷하다. 예술의 힘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러한 정신적 교감에 있다. M. Heidegger, Etre et Temps, trad. fr. Paris, 1985, p. 115. 


  특히 바르트의 레키쇼(R quichot)는 "작가 자신과 대상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돌출되는 강렬한 생성적(천지창조적 시원적   순수 그   자체) 심령체의  감정이다."  여기서  "심령체(l'ectoplasme genese)"는 물질이 찐득찐득하고 몹시 날카로운 전율(소리가 극단적으로 예리한 것으로 일종의 학대 음란증)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추상화되는  순간인데 그때 발생하는 감정은 예술적 생산물이 된다. Roland Barthes, L'obvie et l'obtus, Editions de Seuil, Paris, 1982, p.209.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랄프 깁슨 “프랑스 역사”시리즈 중에서


 

 

 

 

 

 

 

 

 

 

 

 

 

 

 

 

 

 

 

[이 게시물은 권학봉님에 의해 2018-04-04 21:05:40 사진조명 동영상 강의에서 복사 됨]

1 Comments
4 초보임다 2018.11.17 11:05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